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이현구의 북악산 자락] 국부(國父) 이승만, 다시 돌아온 광복절

기사승인 2018.08.14  06:49:49

공유
default_news_ad1
   
 

   학창 시절 ‘국사(國史)’ 과목에 완전히 흥미를 잃은 적이 있습니다. 농촌 읍내 중학교에 까칠한 장발머리 총각 선생님이 부임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어느 봄날 2학년 국사 시간, 그 선생님은 이승만 대통령을 구한말 대신 이완용과 ‘나라 망친 인물’로 거의 동격 취급하며 두 인물이 모두 ‘전주(全州) 이씨’라고 일갈했습니다. ‘본관(本官)’이 뜬금없이 언급되면서 조선 왕족 가문이란 것을 알량한 자랑거리로 여겨온 사춘기 중학생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 앞에서 울면서 교실 상황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림잡아 2000 페이지는 될 듯한 엄청난 두께의 ‘인명 국사대사전’을 꺼내시더니 “이승만은 전주 이가가 맞지만 이완용은 아니야, 여기 봐 매국노 이완용은 ‘우봉 이씨’라고 돼 있네”라고 설명해줬습니다. 울분 속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저는 다음날 국사 시간 손을 번쩍 들고 팩트를 전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하고 찾아봤는데, 이완용은 전주 이씨가 아니라 우봉 이씨입니다” 기습적인 학생의 반기에 허를 찔린 선생님은 “짜식 무슨 소리 하냐, 이완용이 전주 이씨 맞아!”라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날 이후 한동안 국사 시간은 지옥이었습니다. 학급 반장인 제게 그 선생님은 잡다한 이유로 견디기 힘든 핀잔이나 망신을 줬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이완용이 실제 전주 이씨일지도 모른다는 참으로 ‘비생산적인’ 의구심 마저 들게 했습니다. ‘독재자’와 ‘부정선거’ 이미지를 불어넣은 교실 수업 이상으로 ‘이승만’이 제 머리 속에 훨씬 부끄러운 인물로 각인된 것은 물론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충격이었던 순간은 그 시절에서 30년이 지나 2013년의 어느 봄날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백년 전쟁'이란 제목의 역사 다큐멘터리 영상물이 ‘1편 두 얼굴의 이승만’, ‘2편 프레이저 보고서’란 소제목을 달고 인터넷에 등장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란 좌파 단체가 제작해 유튜브에 올린 이 영상물에서 대표적인 ‘친노 연예인’ 권해효씨는 미국 CIA 보고서가 남긴 글귀라며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며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란 나레이션 등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이 동영상은 이승만을 ’추악한 인물‘로 그리면서 심지어 하와이 교민들이 낸 성금을 횡령하고 법정에서 독립운동가를 밀고했다며 해외 독립운동 시절을 깡그리 폄훼했습니다. 단숨에 수백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 영상물 내용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도 차갑게 식혔습니다. 남정욱 숭실대 교수는 “건국 대통령을 하와이 갱단 두목으로 조져 대한민국의 첫발에 재를 뿌린 나라다, 여기서 더 가면 정말 태어나지 말았어야 나라가 된다”며 좌파가 장악하고 있는 역사학계의 움직임을 개탄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라이벌격인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은 해방 정국에서 희비가 크게 엇갈렸습니다. 하지만 백범 암살 사건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부패한 미제 앞잡이와 위대한 영웅으로 갈렸습니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서가(書架)에 꽂힌 사가(史家)의 책들이 말해주듯 김구는 빛나는 별로 남았지만 이승만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잠들어있습니다. 최근들어 보수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지고 일각에서 추앙하는 움직임까지 벌이는 다소 과한 듯한 이런 모습은 어쩌면 ‘작용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따르는’ 그간의 왜곡된 평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저는 이영훈 교수가 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대한민국 이야기’란 제목의 매우 보수적인 역사평론서를 보면서 오랫동안 가해진 이승만에 대한 일방적 평가가 ‘반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이 책에서 ‘이승만 대통령 바로알기’를 목차에 담아 이렇게 주장합니다 “...물론 이승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권위주의적이었던 도덕적 비판에는 동의할 만한 점도 있습니다. 그가 재임 마지막 3~4년간에 범한 정치적 실수는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국민 대다수가 문맹에다 소득 40~60 달러의 가난한 소농이고, 사회는 이념적으로 분열돼있고,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던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경제체제를 나라의 기초 이념으로 확고히하고 농지개혁을 통해 통합적인 국민을 창출하고, 자유진영의 해게모니 국가인 미국과 군사동맹을 이끌어내는등 ‘나라 세우기’의 정치에서 그가 후대에 남긴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입니다. 대한민국 교과서는 그를 건국의 원훈으로 정중히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 우리사회 보수와 진보세력간 대결의 장인 국회를 중심으로 ‘건국절’ 논란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대표적인 보수 정객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이 이승만 대통령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서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의 처지를 가른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축입니다. 그가 닦아놓은 사상적, 정치적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도 이뤄냈고 21세기 선진국의 반열에도 올랐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사상적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폄훼되고 왜곡되어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는 키워지고 공은 축소되고 있습니다”라며 축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내년을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으로 만들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힌 바 있어서 73주년 광복절 이자 정부수립 70주년을 맞는 내일 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밝힐 메시지가 주목됩니다. 문 대통령이 그토록 건국의 출발점으로 삼고 싶어하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면 1948년을 건국의 해로 고집하는 보수 세력과의 ‘타협 지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30년을 뛰어넘은 이승만의 ‘임시정부 건국 정신’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정신’의 뿌리가 다를리 없고, 그것은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한분이라도 더 찾겠다고 공언한 문 대통령이 가진 애국심과도 맞닿아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 초 군사독재의 시절 중학교 교실에서 이승만 가문의 본관을 강조했던 총각 선생님의 비장한 눈빛도 그 나름 애국심의 또다른 표출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에게 국부(國父)인 것 만큼은 분명한 이승만을 향한 시선이 정치권이나 역사 학계보다 학교 현장에서 먼저 따뜻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현구 정치외교부장

이현구 기자 awakefish9@gmail.com

<저작권자 © 불교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기사 댓글 3
전체보기
  • 비구니 2018-09-21 23:51:26

    아래 흑금성님 미국이 이 지구별의 주인이라도 되나요.
    현재 유엔에 남북이 동시에 가입되어 있다는 것이 더 고른 역사 인식이 아닌가요
    독립을 위해 애 쓰신 순국선열에 대한 예의라도 있다면 당연히 김구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적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승만은 기독교 선교사에 가깝지요신고 | 삭제

    • 흑금성 2018-08-17 09:54:58

      해방후 UN은 단일정부 구성을 촉구했지만 결국 먼저 이를 저버린 건 소련-김일성이다. 이승만이 남한정부를 구성했고 미국은 남한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민족주체성을 가진 국가로 인정했다. 아직 북한은 괴뢰집단일 뿐이다. 우남의 과오가 없진 않다. 무덤에 침을 뱉을 순 있어도 어쩌면 그의 기민한 판단을 통해 오늘 대한민국이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신고 | 삭제

      • 풍금정원 2018-08-16 11:16:07

        백범은 빛이다. 자주독립과 하나된 건국을 위해 임정 후기를 이끌고 과감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정통성과 대중적 지지를 광배처럼 업고 있다. 우남은 어둠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의 사상적 뼈대를 구축했지만, 미군정 이후 반쪽짜리 건국의 책임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늘 그의 이름에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우남은 오늘의 기초를 만들었다.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는 글쓴이가 말한 아이구아이구, 1919년에 주목한다. 정말로 거기서 지난한 보수-진보의 갈등이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신고 | 삭제

        최신기사

        set_A2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set_C1
        ad44
        ad36

        BBS 취재수첩

        item41

        BBS 칼럼

        item35

        BBS <박경수의 아침저널> 인터뷰

        item58

        BBS 기획/단독

        item36

        BBS 불교뉴스

        item42
        default_side_ad3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