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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토론 (27)] '분노의 사회 대책은?'...전현수-이진경 "분노는 일어날 만한 조건에서 발생...조절할 줄 알아야"

기사승인 2018.06.08  11: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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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2018년 6월 8일(금) 오전8시부터(라디오)
     *TV는 다음주 화 밤9시, 수 오후3시 40분, 토 밤11시
주제: 분노의 사회 대책은?
진행: 이각범(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패널: 전현수(정신과 전문의), 이진경(서울과기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전현수 :
“화내고 있는 사람은 화를 낼 수 있도록 보고 있는 것”
“화가 나려할 경우 정확히 보면서 정말 화낼 일인지 아닌지 검토해야”
“화가 우리 존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불교가 자세히 알려줄 뿐 보통 잘 알려져 있지 않아”
“화는 근본적으로 무지와 탐욕에서 생겨... 화나면 자신과 타인을 보호할 수 있도록 빨리 그 자리를 떠나야”
“남의 지적 때문에 화가 나려할 경우 그 지적이 옳다면 고치고 옳지 않다면 화낼 이유 없어”
“알고 모르고가 분명한 지혜를 가져야 하고, 자기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이진경 :
“사회적 분노는 받았던 고통을 그만큼 돌려주는 게 공정하다고 오해할 때 발생”
“분노의 감정은 원인이 해소되지 않으면 남아 있다가 다른 계기에 가중돼”
“수용력 떨어지면 조그만 자극에도 강한 폭발력 갖게 돼”
“분노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린 다음에 소통하려는 여유가 필요”
“증상이야말로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는 통로... 증상을 잘 살펴야”
“SNS 익명성은 전염의 새로운 통로를 제공...SNS를 없앨 수는 없고 감염통로를 다루는 법으로 접근해야”

 

이각범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불자들은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분노지수는 각박하게만 느껴지는 현대사회에서도 매우 높아지고 있고 추구하는 바가 성취되지 못할 때 우리는 곧 바로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내가 곧 이 상황을 통제하는 주인이다 하는 의식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탓하고 남을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고통이 만들어질 갈 경우에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해결의 해결의 단초는 자신에게 있다고 알고 문제해결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은 누가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 입니다. 오늘 BBS 화쟁토론은 분노의 사회 대책은 무엇인지, 전문가 분들과 의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정신과 전문의이신 전현수 박사님 나오셨습니다.
  
전현수 :
반갑습니다.
  
이각범 :
그리고 이진경 서울과기대 기초교육학부 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진경 :
반갑습니다.
  
이각범 :
오늘의 주제는 분노 사회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대책을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먼저 오늘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 분노가 극에 달하는 사회가 되었는지 분석을 해본 뒤에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노란 어떤 것인지 개인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 양쪽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심리적인 면 또 정신과 전문의로서 활동하고 계시는 전현수 박사님 모시고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전현수 :
제가 생각할 때는 화라는 것은 어찌 보면 한 개인과 또 개인이 둘러싸고 있는 사람 또는 사회 사이에 충돌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개인이 볼 때 뭔가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일어나거나 또 뭔가 원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거나 뭔가 불만스런 상황 때 나올 수 있는 게 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화가 나는 근원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죠. 사람마다 다른데 그 사람이 어쨌든 이 화를 내는 그 시점 이전에 어떤 것이 원인이 되서 화를 내게 된다고 봅니다. 저는 화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적인 반응이라는게 세상을 또는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보는 것의 결과로서 어떤 감정이나 행동이나 태도나 이런 것들이 나온다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화내는 사람인 경우에는 화를 낼 수 있게 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만약에 화가 안 일어날 수 있게끔 보는 것으로 바뀐다면 화는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마다 보는 것은 다 다릅니다. 다른데. 화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게 된 데에는 소위 말해서 어떤 심리적 요인도 있겠죠. 심리적인 요인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릴 때 자라온 환경도 있을 수 있어요, 환경도 있을 수 있고 살아오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좌절될 수도 있을 수 있고, 사람마다 가치관이 굉장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올 수 있는 것이 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나와 세상이 또 나와 남이 충돌하는 그런 현상이 화인데, 그러면 그 화를 우리가 정말 정확하게 보고서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보고 잘못된 것을 바탕으로 일어날 수도 있어요. 또 자기의 개인사에 국한된 과거에는 자기한테는 정말 절실하고 옳았을지 몰라도 지금 시간이 많이 흐르고 상황도 바뀌었는데 부적절하게 화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화나는 현상을 어찌 보면 개인으로서도 화나는 현상을 잘 관찰하고 돌아볼 때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잘못된 것이 치유될 것이 있고 어떤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화 현상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에 굉장히 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각범 :
그러면 사회학을 전공하신 우리 이진경 교수님은 분노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형성 원인은 어떤 것인지, 사회적 원인의 관점에서 한번 분석해 주시죠.
  
이진경 : 
예, 일단 분노는 잘 아시겠지만 감정이지 않습니까? 예전에 로마시대의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가 굉장히 다른 감정과도 다르게 공격적이기만한 이런 종류의 감정이라고 말을 했는데, 사실 분노의 감정은 굉장히 reactive한 감정이죠. 니체가 reactive하다, 반동적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반작용적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분노나 화는 ‘100 사람이 들어서 100 사람이 다 화 낼만 하네.’ 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화를 내고 싶어서 내는 경우는 없잖습니까? 무엇에 의해서 나한테 액션이 온 것에 대해서 reactive하는 거라는 점에서 분노고 반작용이고, 그러다 보니까 반작용을 하는 경우에 작용하고 자기의 크기가 비슷하게 될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뉴튼도 ‘작용과 반작용이 같다.’라고 하는 법칙을 얘기한 적도 있지만 성향적으로 ‘내가 이 만큼의 고통을 받았다면 이 만큼을 되돌려줘야 해.’ 이런 종류의 균형감 같은 게 묘하게 깔려있는 것 같고 그래서 분노의 감정 밑에는 채권자 의식 같게 있는 것이 아닌가. ‘나한테 이 만큼의 고통을 주었으니까 나도 이만큼의 고통을 나한테 받아야해.’ 라고 하는 ‘이런 돌려주겠다.’ 라고 하는 채권자 의식 같은 게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분노라고 할 때는 그런 점에서 보면 누군가 받았던 고통을 그만큼의 양으로 돌려주려고 할 때 그 균형, 이런 것들을 정의라고 공정성이라고 오해할 때 발생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받아왔던 것만큼 너희들에게도 돌려주겠어.’ 이렇게 되어버릴 때 서로 가해와 피해가 등가화되어야 한다는 이런 종류의 관념. 사실 니체 같은 경우에는 이런 걸 비판을 하면서 오히려 정의라고 하는 것은 감정적인 reaction을 벗어나서 ‘아, 그 정도는 다 수용할 수 있어.’ 라는 힘이 생길 때 감능한 거고, 그래서 분노의 등가성을 액션·리액션의 등가성을 벗어나서 그러한 것들이 정말 지금 현재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볼 수 있을 때 이제 해결될 수 있다,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이렇게 얘길 한 적이 있는데, 하여튼 사회적인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더욱더 어떤 고통이라든지 피해라든지 있을 때 사실 분노가 사회적으로 야기되고 이런 분노는 충분한 이유를 갖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까지도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세월호 때도 그랬던 것 같고 그 다음에 요새 ‘미투’ 운동이나 이런 것도 마찬가지 일텐데, 분명히 그것은 타당한 이유를 갖는데 타당한 이유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reactive 감정이고 reactive한 감정을 넘어서지 못하면 사실은 그냥 고통을 되돌려주겠다 라고 하는 이런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난점같은 게 있다는 그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이제까지 보면 어떤 고통들이 굉장히 광범했을 뿐만 아니라 고통들을 빨리 빨리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고 사회적으로, 그런 것들이 오래 방치되거나 무시되었을 때 사실은 증폭되지 않습니까? 이런 분노의 감정은 해결이 안되면 그대로 남아 있다가 다른 분노할 꺼리가 생기면 거기에 딱 더해지면서 또 가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게 한국에서 분노가 흘러넘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게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각범 :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사실은 그 사회의 교양 수준과 참 많이 관계가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우리 사회의 이 분노처리 방식 이게 말이죠, 그동안 상당히 나빠졌습니다. 비교적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인 방글라데시나 이런 나라가 행복지수가 더 높고 우리 사회는 최근으로 올수록 특히 최근에 급격히 분노지수가 높아지고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반비례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최근에 이런 것은 어떻게 우리가 원인을 어떻게 찾겠습니까?
 
이진경 :
그것은 일단 사실 제가 몸이 건강할 때는 웬만한 자극도 별로 강하게 쳐내지 않게 되는데, 몸이 약할 때는 쉽게 “에이” 하면서 짜증을 내면서 쳐내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분노로 쉽게 바뀌는데, 그 말은 분노가 쉽게 표출되는 것은 분노를 수용할 수 있는 capacity 수용력 같은게 약하다는 뜻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그러한 점에서 헬조선이니 뭐니 이러면서 청년들 경우도 더 그렇고 청년뿐만은 아니죠. 직업을 찾기도 쉽지 않고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렵고 비정규직이나 실업 이런 것들도 많고 이런 경제적으로 capacity가 떨어지고 그 다음에 정치적으로도 어쨌든 예전의 용산의 경우에도 문제가 발생하고서 2년 동안 아무 처리도 안하고 그냥 농성하는 상태에서 방치되어 버렸고 세월호도 그냥 몇 년을 방치되고 이런 식으로 어떤 큰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생겼을 때 방치가 오래 계속되는 이런 일들이 빈번해지니까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고여있고 쌓여 있던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서 경제적으로는 수용력이 떨어지니까 이런 것들이 조그마한 자극에도 굉장히 강하게 폭발력을 갖게 된게 아닌가 저는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이각범 :
용산은 여러 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거지만 세월호가 몇 년 동안 방치되었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쉽게 동의하기 힘듭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굉장히 많은 사실은 예산이 투입되고 초기에 구조를 잘못했느냐 안했느냐부터 시작해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인 논란이 있었고 결국은 정권이 바뀌는 경우까지 갔는데 저는 사회적으로 몇 년 동안 세월호가 바다 속에 있었다는 것으로 세월호 문제가 그냥 방치됐다 라고 하는 주장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의 수준을 높이고 사회적 분노 수준을 높이는 측면이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있고요.
 
전현수 :
저도 한 말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정확하게 보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라는 것은 사실 일어날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일어났을 때 그 문제의 대해서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 문제를 또 덮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점점 복잡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잘 보면서, 그러니까 저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 환자들이 화가 많고 이렇기 때문에 ‘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은 그 쪽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문제로 인해서 당신이 문제가 생기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내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 기본적으로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저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그럴 때 그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고 지혜롭게 해결하려는 그런 마음이 없으면 자칫하면 내 문제가 생기면서 문제가 문제를 만드는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화라는 성격이 파괴적입니다. 지금 제가 화나면 이거 집어 던지고 싶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굉장한 어떤 파급력을 가지는 이런 화에 대해서 정말 우리는 쉽게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을 정말 우리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무슨 일을 하면 상응하는 결과는 분명히 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감당할 수 밖에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보려는 마음가짐 이것을 좀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합니다.
 
이각범 :
우리가 부처님께서도 우리 초기경전에서 보면 화살을 맞았을 때 그 화살을 빼고 화살을 맞은 곳을 치유하고 해야지 이것을 ‘누가 쏘았느냐?’, 그 화살 맞은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울고 짓고 하면 사실은 화살을 두 개 맞는 것이다. 연달아 맞는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결국은 마음챙김을 강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이 분노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통해서 우리가 이 분노를 살펴볼 수 있다면 많은 사회적 분노 또한 마음챙김을 통해가지고 계속 이 사람이 증폭시키면 저 사람이 증폭해서 사회적으로 증폭하는데,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어떻게 우리가 원래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을까요?
  
전현수 :
저는 분노도 그렇고 다른 감정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어떤 의지나 이런 것도 다 정신작용의 하나로 봅니다. 우리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죠. 그런데 저는 초기불교를 하면서 수행도 많이 했습니다. 하면서 이렇게 볼 때 기본적으로 우리 몸과 마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 순간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움직이면서 그 조건은 고정된 조건이 아닙니다. 계속 새로운 조건 새로운 결과가 나오는데, 그럴 때 우리 속에서 우리는 사실 바깥 상황이 우리한테 직접 영향주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되는데 그 때의 마음챙김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서 어떤 게 일어나는 것을 잘 볼 수 있다면 ‘아, 내가 지금 이런 화를 내는구나, 또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면서 그것이 정말 타당한지 아닌지를 우리 자신이 순간에 격렬한 순간에 반응을 보면서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실은 화라는 것도 처음부터 엄청나게 화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아주 미세하게 올라오는데 그것이 방치되면 그걸 조건으로 화가 자꾸 생길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정말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저는 훨씬 부처님의 조금 전에 부처님 말씀 하시니까 기억이 나는 게, 초기경전에 보면 어떤 집안의 좋은 집안이죠, 그 집안의 장남이 부처님한테 불만이 있어 따지러 갔다가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장손이 출가를 해버린 거죠. 그 집은 상당히 문제가 생겼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동생되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온갖 욕을 다하죠. 하니까 부처님께서 가만히 듣고 난 뒤 그 다음엔 이런 비유를 해요. 내가 당신한테 하나 물어보고 싶다. 당신 집에 손님이 찾아오나? 그러니까 찾아온다. 그럼 그 때 음식을 대접하냐? 하니까 대접한다 그래요. 만약에 당신이 손님이 왔는데 거기에 쓰레기다, 오물이다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대접을 하면 상대방이 안 먹으면 어떻게 하냐? 그럼 내가 치워야죠. 오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니까 지금 당신 나한테 화내는 거죠? 나는 이미 화를 다 극복했다.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히 보면서 정말 그것이 화낼만한지 아닌지 그 출발부터 검토해야 하고요.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보는 것, 또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이야깁니다. 사실 어려운 이야기고 해서 정말 이것이 진지하게 한 번 검토돼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각범 :
예. 이걸 다시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영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저는 똑똑한 여자고 철학적으로도 깊이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데, 영어로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We reject the politics of accusation and the politics of resentment” 라고 했어요. 우리는 남을 매도하는 정치, 그리고 남이 갖지 않은 것을 가졌다, 거꾸로 얘기하면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저 사람이 가졌다 라고 하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정치를 하는 그런 정치를 배격한다 해서 우리 사회의 정치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퇴행적 행태와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우리의 대처에 대해서 얘길 했는데 원천적으로 우리는 분노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여러 사회적인 구조, 또 정치적인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상대편을 나쁜 세력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해서 공격하는 경우에 이것이 곧 사회적인 분노를 증폭시키고 이런 것으로써 분노가 일상화되는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이진경 교수님 얘기해 주세요.
 
이진경 :
지금 선생님께서 오바마 대통령 부인 말씀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는데 거기 보면 resentment, 불어로 뭐 레상띠망.

이각범 :
레상띠망(Ressentiment) 이죠.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하기가 힘들어요.

이진경 :
보통 앙심, 원한 뭐 강하게 하면 원한 이런 말이 될텐데, 사실 니체가 그런 우리들의 삶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Ressentiment이다. 원한이고 앙심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고 사실 원한에 사로잡히는 순간 예를 들면, 동정이나 연민이나 이렇게 공감이나 이런 것이 원한하고 딱 결합이 되버리면 더 없이 가혹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없는 공격성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걸 심지어 이용하기도 대중들의 원한-분노를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일들이 정치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아무리 원한의 이유가 타당하더라도 이유의 타당성이 결과의 타당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굉장히 사실 어긋나는, 원래 가려고 했던 것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참 불행하게도 원한이나 앙심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reactive한 거라서 사로잡히게 되는 순간 사실은 논리가 작동하지 않고 감정이기 때문에 논리가 작동하지 않고 사로잡히게 되는 순간 그것에 끌려 다니게 되지 내가 움직이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경우에는 사실 저도 요새 많이 느끼게 될텐데, 이건 아니지 싶은데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 먹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다들 경험하셨을 것 같아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원한의 감정까지 확 드러나면 “아, 그게 아니라니까”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되는 거죠.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도 안되고 그럴 때 시간이 가라앉은 시간이 필요한 거고, 가라앉은 뒤에야 조금 말이 통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을 해보면 당장 일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은 또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어서 저도 이제 그런 경우를 많이 당하는데, 저는 그러면 ‘이럴 때는 욕먹어 주는 게 공덕을 쌓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왜냐하면 프로이트도 그러지 않습니까? 쌓인 트라우마 같은게 있으면 자유연상을 통해 많이 누구에게 얘기할 수 있으면 일단 해소 될 가능성이 생기는데 이게 누구한테 얘기를 못한 채 있으면 전혀 해소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사회적인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욕을 하면 욕을 먹어주는 것, 능력 있는 사람은 ‘그 정도 욕먹어도 ‘나는 큰 지장없어.’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저는 ‘그냥 욕할 때 욕먹는 주는 것이 공덕이다, 저는 오해일 때는 오해를 당해 주는 게 공덕이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풀리면 가라앉을 거고 그때 다시 얘기를 “오해다.” 라는 얘기도 그 때 비로소 귀에 들어가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자꾸 우리는 또 그것을 반박하려고 하게 되고 잘못되게 부정하려고 하게 되면 거기에는 자아가 발동하지 않습니까? 사회적 자아 혹은 개인적 자아가 발달하면서 자아는 본질적으로 방어기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순간 내 얘기가 귀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내 얘기를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만 막 떠오르기 때문에 얘기가 더 안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서로 여유가 필요한 게 아닌가. 사실은 저도 이런 accusation의 정치학이나 원하는 정치학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피할 수 없고 정말 난감하게도 발생하는데 걷잡을 수 없을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를 본다고 한다면 욕하거나 그런 것들이 표출될 수 있는 것들을 받아주면서 그게 가라앉은 것을 기다린 다음에 그 다음에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사실 그런 여유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입니다.
  
이각범 :
그러니까 우리 이진경 교수님 말씀은 이 accusation 이런 것에 대해서 바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기 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여유를 가지고 대처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증폭시키는 기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아직 안하셨는데 나중에 그 증폭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요. 전현수 박사님은 정신과 전문의적 입장에서 보시면 요새 뇌과학이 거의 교양과학 수준에 이르렀어요. 일반 사회적인 교양수준으로 뇌과학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데 그 관점에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
  
전현수 :
그 답하기 전에 아까 이진경 교수님 이야기 해서 생각난 것이 있어서 이사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accusation, 비난은 결국 말로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서 떠오르는게 있어서. 부처님께서 말을 할 때 이런 것을 갖추어서 해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5가지 요소를 좀 갖추어서 말을 하는 게 좋겠다 했거든요. 첫 번째 갖춰야 할 요소가 사실이어야 된다. 사실이 아니면 말하지 마라. 사실 이라는 것은 본 것은 본 것입니다. 요만큼 봤으면 요만큼 봤다. 보통 사람은 이만큼 보고 덧붙이면 이것은 완전한 사실은 아니죠. 딱 보면 본만큼, 들으면 들은 만큼, 내가 생각했으면 생각한 만큼, 알면 아는 만큼. 그렇게 일단 사실일 때 말을 시작해라.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사실이라도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5가지를 갖춰야 되니까.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된다.’ 이런 말씀하셨어요. 그 다음 가치가 있더라도 이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가 말로 하게 되면 개인한테도 할 수도 있고 그룹한테도 할 수도 있고 이 사회에 대해서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여기에 도움이 되나 이것을 따져봐라. 요 3개를 갖추어라. 그 다음 3개가 되더라도 그다음으로 ‘적절한 시기를 잡아라.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라.’ 그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해가 될 수가 있거든요. 다섯 번째는 ‘적절한 표현을 하도록 해라.’ 거부감이 없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가 5가지 지키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재미도 없고 신문사 같은 경우 쓸 말도 없고 하지만 우리가 이거 정도는 새기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고. 아까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뇌과학적으로 보면 대뇌변연계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뇌의 중간쯤에 들어있는데 뇌의 편도체라는 것이 있습니다. 편도체라는 것이 분노하고 관계가 됩니다. 분노한 사람들을 보면 편도체가 팍 폭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발하는 동안에는 다른 것들은 어찌 보면 마비가 되는 거죠. 그럴 때는 아무것도 안통하는 거죠. 그런데 이 편도체가 작동하는 순간에는 대뇌피질에 이성적인 파트가 작용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정신과 치료의 정신치료라는게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이렇게 하는. 그걸 하게 되면 대뇌피질의 어떤 시스템이 잘 활성화되면 이 편도체하고 연결되는 선이 생긴답니다. 그러면 편도체가 탁! 할 때도 여기서도 탁! 작용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자꾸 노력을 하면 화가 폭발하는 그 순간에도 이성적인 게 작용할 수 있고요. 제가 또 하나 조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는 수행을 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초기불교를 전공하면서 아비담마라는 것을 하고 제가 직접 수행에서도 보기도 했는데, 사실 우리가 화에 대해서 정확히 잘 모릅니다. 그리고 프로이트나 지금 심리학들이 억압된 것은 좋지 않다. 그래서 표현하면 참 좋다. 심지어는 화를 내는 것도 좋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좀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게 있냐면 화가 실제로 일어날 때 우리 내면의 어떤 변화가 있나를 정확히 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제가 볼 때는 참는 것도 합니다. 참는다 라는 것은 약하게 화내는 거죠. 폭발하는 화는 폭발하는 화입니다. 그래서 정말 참는 것보다는 자기 표현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화가 실제로 우리한테 일어날 때 그것이 우리의 존재 속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 하는 것은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만 알려져 있는데 다른 정신분석이나 다른 심리치료는 그것을 모르니까 상대적으로 화내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가 정신인식 과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있어서 내가 어떤 사람을 생각하고 화가 났을 때 우리가 삼매를 닦고, 삼매라는게 마음이 하나로 모아진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이런 것들이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될 때 보면 우리가 화날 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생각해서 화난다 또는 누가 말하는 것 보고 화난다 그럴 때 잘 보면 생각을 해서 화나는 경우는 의문전향이라는 마음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 속행이 7번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간단하게 1초에 몇 천 만 번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특히 의문전향이라는 것은 기능만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성자든 누구든 아무 관계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속행 부분에서 어떤 마음이냐, 유익한 마음이냐 해로운 마음이냐에 따라서 그 어떤 마음의 구성요소가 많이 달라집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탐진치에는 기본적으로 4가지 안 좋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 무지라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보든지 생각하는 그 대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그 무지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것이 나한테 손해고 이것은 좋지 않은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다음에 들뜬 마음이 되고 그 다음은 탐진치에 따라서 마음부수들이 있거든요.
  
이각범 :
우리 전 원장님이 방송에서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를

전현수 :
그렇습니까?

이각범 :
제가 그냥 간단히 이해하는 부처님의 관점에서는 화가 났을 때 단순히 화를 억누르려 하거나 또는 화를 터뜨리거나 그러기 보다는 화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봐라, 그리고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하는 나를 봐라.
  
전현수 :
그렇게 보면 됩니다. 일맥상통하는 이야깁니다.
 
이각범 :
그게 제가 이해하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전현수 :
예, 그래서 일단 화가 한번 나면 뭔가 안 좋은 현상이 몸에 확 있다고 보셔야 됩니다. 있다고 보시고 그래서 화라는 것을 적어도 조장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화를 뭐 미화시키는 것보다는 화가 기본적으로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 다음에 화라는 것은 사실은 제가 볼 때는 무지를 바탕으로 생깁니다. 무지와 그 무지를 바탕으로 하는 욕심, 이런 것들에 의해 나기 때문에 정말 화나는 순간에 잘 그것을 해야 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환자의 경험이 많으니까. 저는 환자들한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이 화나면 빨리 어딘가 어디 도망가라고 그래요. 내 자신과 앞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잠깐 어디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라 뭐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이각범 :
자 그러면은 일단 우리가 1차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잠시 전하는 말씀 듣고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2부 ]
  
이각범 :
그런데 이 분노의 감정을 이용해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정권이 바라는 방향으로 대중을 조작한 사례가 역사상 많이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의 괴벨스가 ‘뭐든지 한 줄만 문장을 쓰면 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아주 유명한 선동가죠. 그래서 유태인 6백만 명을 죽인 것, 이것은 간단하게 독일 국민들에게 ‘유태인이 우리의 재산을 착취하고 있다.’ 하는 그걸로 집단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일으켜서 했고, 또 소련의 스탈린이 수 백만 명을 학살했는데 그것도 ‘반혁명적이다’ 라고 해가지고 혁명의 적이다 라는 것으로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경우를 봅니다만 학교에서 선생님이 ‘저 앞에 있는 아파트의 주인들은 다 부정을 해가지고 저기에 사는 것이다.’ 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데, 그 학생들의 부모가 사회적으로 적폐세력이다 하는 것을 학교 선생님이 조장을 했거든요. 가까이는 1966년에 시작했던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이 그랬습니다. 저도 그 시절에는 대학생이었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이웃나라지만 정말 심정적으로 동조를 하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는데, 실제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시절에 대학 생활을 지냈던 10년 세월동안 그 세대는 중국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대로 전락했고 그래서 후진타오가 중국 주석이 된 것도 1962학번이죠. 문화대혁명 전 세대이기 때문에 그랬었고 시진핑 주석도 거기서 문화혁명 세대를 건너뛰면서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세대에게 나중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위의 시대를 만들면서 젊은 세대는 그 시절에 이 분노의 물결에서 엄청나게 동조를 하면서 거기서 자기와 분노를 동일시하며 지냈거든요. 이렇게 분노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사회파괴적으로 되고 분노를 통해서 물론 정치세력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끌어갈 수 있지만 결국 그 폐해는 수십 년 뒤에 바로 그 시대를 살았던 중심 세대가 받게 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 우리 이진경 교수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진경 :
예, 극심한 경우가 아니어도 사실은 어디나 다 지금도 유럽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도 많이 그렇게 하고 그래서 극우파 정치인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네오 나찌라고 불리우는 사람도 있긴 한데. 그런데 사실 그런 정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 아주 끔찍한 참상이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예를 들어 스탈린이나 문화혁명을 생각하면 ‘사회주의도 싫다, 사회주의자 같은 사람 싫다’도 생각하기 마련인거고 아마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각범 :
그런데 문제는 세계 속에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분노를 조장하는 그 물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분노를 조장하는 물결 속에서 분노에 가담하고 있다는 데에 집단적인 문제가 있거든요.
  
이진경 :
예.

전현수 :
그 점도 있고 제가 읽은 ‘도덕적 개인, 비도덕적 사회’ 그것을 보면, 알고도 두려움 때문에 어떤 흐름이 물밀 듯이 가면 어떤 두려움 때문에 말을 못합니다.
  
이진경 :
말을 해도 소용이 없죠. 들리지도 않고. 그럴 때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라고 생각을 하고 그냥 조용히 지내는게 상책이다 라고 다들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의 미덕들을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의 저항은 역사에 남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바꾸지는 못했던 것 같고 그러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에는 정치라는 게 원래 최선은 커녕 제일 나쁘지 않으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영역이라고 생각은 드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해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많은 경우에는 분노들이 나름대로의 분노의 이유가 있거든요. 분노가 그냥 맨땅에서 생겨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했을 때 분노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런 질문은 역시 놓치지 않아야만 오히려 그런 문제를 정확히 다룰 수 있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저는 어쨌든 분노의 정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모든 것에는 발생의 이유가 있는 거지 않습니까? 연기적 조건이라는게 있는 거고. 그랬을 때 분노가 이렇게 있을 때에는 ‘분노가 문제다.’ 라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 분노는 도대체 무엇에 연하여 일어나는가.’를 봐야 하는게 아닌가 라고 생각이 들고, 그것은 그런 점에서 보면 분노를 하나의 증상으로 다루는 것, 그랬을 때 고통도 그렇고 증상도 그렇지 않습니까? 증상이라고 하는 것은 몸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가를 표현해 주는 지표 같은 것인데, 사실 고통이든 저도 두통을 자주 앓으니까 그럼 힘드니까 얼른 진통제를 먹거든요. 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이 사라지니까 다시 그냥 멀쩡한 것이라고 오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두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건데 놓쳐 버리는 거죠. 저는 그래서 진통을 쉽게 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진통제는 아껴 먹어야 된다. 정말로 오히려 고통과 통증이라는 것, 원래 부처님도 고통이라는 것은 스승이라고 삼법인이나 사성제에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사성제에도 하나에 들어갈 정도인데 그런 점에서 고통을 다루는 불교의 방법의 하나로 분노 역시도 사성제의 고통 중의 하나, 그런 점에서 스승으로 삼는 방법 그래서 그런 걸 찾아야 될 것 같고. 그것은 증상으로 삼았을 때는 사실 증상이야말로 병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고 치료법을 찾아 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본다고 그런다면 분노로 야기되는 결과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분노를 증상으로 다루려는 태도 같은 것, 이 분노의 원인이 무언가에 대해서는 결과가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통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노의 정치에 대해서 언제나 무력하게 끔찍한 결과에 끌려 다니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각범 :
분노라는 것은 지금 이진경 교수님 말씀대로 생기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관찰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다면 분노는 부정적인 것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분노 또한 그렇고 개인적 분노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개인적 분노 차원에서 보시면 전현수 원장님.
 
전현수 :
저는 분노가 확 일어날 때 누구한테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럴 때 저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훑어봐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돌아봐서 내가 저 사람이 말하는 저 사람이 화낼 수 있는 요소를 내가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일단 한번 성찰을 빠른 순간에 해봐라 그럽니다. 그래서 만약 남이 기분 나쁘고 화낼 수 있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그거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른 사람이 나한테 또 화낼 수도 있거든요. 그런 요소가 만약 있다면 수정, 고치는 것이 좋다. 고치는 것은 내가 좋아지는 것이니까요. 다음에 차후에 누구한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을 것을 방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단은 화가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화를 할 때 화내기보다는 일단 내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내 속에서 고칠만한 게 있는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봐라. 내가 내 자신을 돌아봤을 때 아무도 그런게 없이 저 사람이 모르고 내 가치를 모르고 했을 뿐일 때는 그 때는 이진경 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때가 아닐 때면 가만히 있고 들을 수 있을 때는 말하지만 그 말 가지고 또 싸움이 날 수 있으니까 좀 멈추고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다. 해서 일단 우리한테 화가 났을 때 정말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세상을 향해서 막 간다면 불이 막 나는 거라고 저는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된 사회는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이 사회가 가는 거지 자기 성찰이 없는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법을 지켜야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분노가 있더라도 법을 지키지 않는 분노는 저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게 법이라 게 언제나 보면 상대방이 있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화난다고해서 도로를 점령한다면 그 도로를 이용해야 하는 사람이 이용을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단 어떤 경우에도 법을 지키면서 하는 그런 게 저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각범 :
법을 지켜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니까, 제가 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하면서도 화쟁토론에서 예를 들었습니다 만은 우리나라 대학생들, 특히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설문했을 때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결정하는 제도다.’ 그렇게 했어요. 1992년 조사지만은 87년 민주항쟁이 성공했던 그 다음에 여백이 있던 때입니다. 그런데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학생들에게 똑같은 설문을 100장을 했는데 거의 ‘민주주의는 법치다.’ rule of law 라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방금 말씀하셨듯이 법을 지킨다는 것, 법에 의해서 집행된다는 것, 민주주의다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착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이죠, 분노사회에서 분로를 어떻게 조절하고 대처할지. 이것은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해야 하거든요. 이것을 어떤 특정 집단이 자기가 바라는 쪽으로 증폭시켜 가지고 하는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SNS가 익명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분노를 무절제하게 확산시키는 것은 없는지 최근에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주에도 제가 목소리가 잠겨서 상당히 방송하는데 어려웠는데 중국발 미세먼지가 폐와 기관지에 겹겹이 쌓여가지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제가 평소에 꼭 하고 싶었던 것 실천해보자 했는데 그게 뭐냐면 목소리가 나쁜시대를 이용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묵언정진에 가까운 정진을 해보자. 그래서 절에서도 묵언정진 해가지고 팻말 들고 꼭 해야 되는 답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한다든지 이런게 있는데 그런 묵언정진 말고 꼭 할 말은  하지만 묵언정진을 해보자 했는데 진짜 많은 것을 느끼겠더라구요.

전현수, 이진경 :
하하

이각범 :
제가 얼마나 쓸데없는 말을 많이 이걸 통해가지고 제가 또 뭘 느꼈냐면 SNS라는 것이 쓸데없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이걸 통해가지고 생각하는 시간보다는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시키는 그런 역기능을 많이 하는 구나. 이것이 분노를 무절제하게 발산하게 하고 집단적으로 광기로 이끄는 그런 기능을 하지는 않는지 이런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진경 교수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진경 :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하고 관련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저도 일단 저도 살면서 화날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돌이켜보면 제가 화가 나가지고 한 언행치고 후회안하는게 없더라구요.

이각범, 전현수 :
하하

이진경 ;
그리고 화났을 때 많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중에 보면 다 망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수행이 깊어지면 화가 안난다고 하지만 그거야 뭐 아라한 경지에 이를 때나 가능한 거니까 우리가 바랄 수는 없는데, 저는 그래서 화를 안낼 수는 없는데 나는 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까를 제 혼자 생각하기에는 ‘일단 화가 났을 때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가 났을 때 풀어야 한다고 그러는데 말을 하는 순간 화가 증폭되더라구요. 그래서 화가 났을 때 화를 표현하면 오히려 화가 증폭되기 때문에 이것은 그 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고 더구나 말을 해서 언행을 해버리면 남을 또 자극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화가 증폭되고 이게 서로 분노의 악순환이 되기 시작되는거 같아요. 서로가 공격을 하면서. 그래서 ‘화났을 때 말하지 않는다. 화났을 때 한 생각은 믿지 않는다.’ 이 두 가지를 나름의 원칙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적 분노도 그런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분노는 감정이기 때문에 감정은 말로 해서 풀리는게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고 가라앉을 때 감정을 감정으로서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틀린 이야기라도 반박해 봐야 아까 부처님 말씀 인용하셨지만 이야기도 할 때를 가려서 할 줄 알아야 하는 건데 화나 있을 때는 말할 때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옳은 얘기도 안들리니까 그 때는 안하는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불행히도 분노라고 하는게 분노가 일어나면 일단 자기가 분노가 알아차리면 반감이 되는데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자기가 화났다 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끌려가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기가 뜻대로 안하고 거기에 끌려다니는 이런 것이 되어 버려서 정말로 분노가 더구나 집합적으로 형성이 됐을 때는 정말 누구도 통제하기 힘든 상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 그래서 그런 건 대단히 유감스럽고 그 다음에 없었으면 좋은 건데 이게 사실은 아무리 바라도 안되는, 제가 화내지 말아야지 아무리 결심을 해도 안되는 비슷한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문제는 이렇게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이런 게 리얼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좋은가 나쁜가를 떠나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다루는게 맞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 이사장님 말씀하신 것처럼 SNS시대여 가지고 분노는 감정이니까 감염과 전염에 의해서 쭉 이렇게 옆으로 퍼져가고 이게 퍼져가면서 점점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SNS는 그런 점에서 전염의 통로를 새로이, 새로운 전염의 통로를 제공을 한 거죠. 옛날 같았으면 인적인 접촉, 직접적인 접촉이어야 되는데 이제는 인적으로 접촉을 안해도 분노가 퍼져가는 통로가 새로 만들어진 거고 분노가 점점 더 빈번하게 늘어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각범 :
아까 말씀하셨던 우리가 같이 얘기했던 미셸 오바마, 대통령 영부인 언어에 의하면 미국의 젊은이들도 아마 그러는 모양입니다.

이진경 :
어디나 다 그렇죠.

이각범 :
너무 생각을 안하고 150자에 묶여 있는 짧은 생각에 일상생활을 보내지 말고 ‘미국의 청년들이여, 제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지금 얘기하신 분노의 조절이라든지 소셜 미디어에 의해서 분노가 확산되는 이런 것에 대해서도 법과 제도, 문화의 관점에서 이것을 우리가 제도적 접근이라고 그러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까?
  
이진경 :
그런데 그게 사실은 어떤 것도 다 비용과 대가를 치르게 마련인데 예전에 건전 비디오를 위한 시민모임 이런 거도 있었기도 했고 그 다음에 SNS나 인터넷, SNS 이전에도 댓글이나 막 난리칠 때 실명으로 하느니 뭐니 했지만 그게 치러야 할 굉장히 대가가 많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발언의 자유나 등등을 제한한다는 것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제가 보기에는 그걸 계속 제한하고 제약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조절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태까지 시도가 있었으나 대부분 다 실패를 했다 라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어쨌건 특히 아까 이사장님 말씀하신 것처럼 익명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표현의 강도, 이런 것들의 조절 같은 것들을 해야 될 책임감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안느끼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 때문에 강도 조절 없이 그냥 조절 불가능 할 정도로 강하게 표현하는 것, 그리고 격하게 표현하는 것, 더구나 SNS에서는 남의 눈에 띄는 게 중요하고 남에게 좋아요, 아니면 공감 클릭 받는 수가 중요하고 매크로 키까지 쓰는 사회 아닙니까? 이런 걸 생각해보면 익명성이라는게 어쨌든 확 부각 남에 눈에 보이게 하게 하는 것들을 쉽게 해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조절 불가능한 전염 강도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기제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저는 어떤 물리적인 힘, 이런 것들이 되는 장치가 되기도 하는 것인데 이것도 하여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거에 대해서 규범적 관점에서 이게 좋다, 나쁘다 하는 관점으로 접근을 하는 것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게 ‘나쁘다’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어쩔 수 없는 이런 사태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SNS가 문제겠지만 그걸 없애자 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도 안받아들일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익명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명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다 큰 반발로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고통 혹은 피할 수 없는 사태라고 보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다뤄야 할까를 새로운 차원에서 고민해야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전에 정치를 한다든지 통치를 한다든지 뭘 하는 사람들이 전부다 사실은 SNS에 의해서 만들어진 감염에 의해 형성되는 정치적 통로라는게 없는 상황에서만 정치학이 구성되어 왔던 것 같거든요. 이것들을 다루는 테크닉으로서의 정치학은 아직도 충분히 발달되지 못한 것 같은데 이 문제를 그래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수록 이 문제를 리얼하게 다룰 것인가. 전 그래서 증상으로써 다루는 방법이 그게 불교에서 가지고 올 수 있는 정치학적 교훈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이런 증상으로 이 문제를, 병에 감염 통로를 다루는 방법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게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각범 :
지금 말씀하신 불교적 관점 이것을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합해서 특히 불교적 차원 또는 명상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하면 좋은지 말씀해 주시죠.
  
전현수 :
저는 그냥 개인적 차원에서만 좀 얘기를 하면, 일단 우리가 알고 모르고가 분명한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사건이 탁 발생하면 이 사건은 이래 생각합니다. 거기에 따라 막 행동해요. 그런데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 때 모른다는 지혜를 사람들이 좀 많이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본다면 지혜와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이 두 가지를 좀 많이 계발하면 우리 사회가 많이 좋아지지 않을까. 지혜를 개발한다, 지혜라는 것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정말 그것을 정확하게 보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걸 잘 모를 때에는 그냥 모른다는 마음, 우리는 그것이 이럴 거다 생각해서 SNS에 글도 올리고 막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면 자기가 생각하는 것하고 실제는 많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뭘 정확하게 보려는 마음태도 이것이, 알고 모르고를 정확히 아는. 그런데 사실은 명상이라는게 해보면 알고 모르고가 좀 분명해집니다.
 
이각범 :
네.

전현수 :
그리고 명상이라는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내 속에서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고 또 내가 어떤 행동이 있다는 걸 그것을 잘 관찰해서 이것이 나에게도 안좋고 우리 사회에도 안좋으면 조금 멈추는 좀 여유를 가지는 사회가 된다면 이 사회가 좀 안정되지 않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각범 :
오늘 두 분 말씀 정말 여러 가지로 귀하고 감사합니다.
  
오늘 정신과 전문의이신 전현수 박사님, 서울과기대 기초교육학부 이진경 교수님 함께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토론 어떻게 보셨는지요? 옛날에 저희 어머니는 제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우다 맞고 들어오면 “맞은 너는 오늘 저녁에 편안히 다리 뻗고 자지만 때린 아이는 불안하고 괴로워서 편안히 못잘 것이다. 싸우지 않으면 제일 좋지만 싸워서 남을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차라리 낫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여유를 갖고 세상을 보며 자식을 가르치기보다 조금이라도 남으로부터 피해를 덜 받게 하려고 하는 오늘의 세태가 분노를 촉발하고 확산하지 않도록 봐야 될 것입니다. 분노의 사회에서 분노를 조장하는 세력에 대하여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마음챙김을 통하여 분노에 대처하는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BS 화쟁토론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끝)

김봉래 기자 kbrbu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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