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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제주에서

기사승인 2017.11.29  21: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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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의 잔재가 도두항의 낭창낭창한 바다를 유혹한다. 이호테우 해변에서 길을 잃은 갈매기들은 에메랄드 빛깔의 함덕에 이르러 안도한다. 용두암의 노을이 붉은 해를 삼키면 수평선은 멸치배의 불빛으로 이내 하얘진다. 검은 현무암이 빚어낸 섭지코지에는 쑥부쟁이들이 만개해 어느 덧 성산일출봉과 어울린다. 망망대해란 이런 것이구나... 내 혈육이 뛰어놀고 있을 바다보다도 푸르구나... 거미줄처럼 얽힌 올레길 어딜 가도 억새풀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국화도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구성지게 울어대던 풀벌레들은 사라졌지만 말들은 여전히 풀을 뜯는다. 실로 바람과 돌이 군무(群舞)로 엮여 하루 종일 협주를 하는 제주의 가을이다. 지독하게 여물었다.

제주에는 강(江)이 없다. 비가 내리면 숨골인 ‘곶자왈’(나무숲을 의미하는 ‘곶’과 토양층이 얕은 황무지, 자갈을 뜻하는 ‘자왈’이 결합된 용어)로 물결이 스며든다. 곶자왈을 구성하는 암괴와 미기복은 지하수를 함양하고 보온보습 효과를 일으킨다. 무엇보다 제주 생태계의 허파 역할을 해 반드시 보호돼야한다. 제주의 자연을 설명할 때 ‘오름’도 빼놓을 수 없다. 화산폭발 때 만들어진 기생화산 ‘오름’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 전역에 360여개나 된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제주도는 올해 ‘사드’로 직격탄을 맞았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중국 사람들 와봤자, 자기들 음식점과 숙박시설만 악착같이 이용해 제주 도민들의 살림살이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천혜의 섬을 더럽히기만 하니, 아예 이참에 국내 소비를 촉진시키고 일본, 동남아 등으로 관광루트를 다변화시켜야한다는 주장이다.

제주 사람들은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한반도를 오직 ‘육지’라고 부른다. 섬 전체 둘레라고 해봤자 187킬로미터, 5백 년 동안 섬 밖을 나가는 것이 금지됐던 세월이 있었고 고기를 잡으러 떠난 피붙이는 주검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래서일까. 예부터 제주는 사당 5백 개, 사찰 5백 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성했다. 해안선을 따라, 집성촌을 따라 사당과 사찰이 빼곡히 들어섰고 특히, 서귀포 해안가에 집중됐다. 제주 사람들은 하늘과 땅, 해와 달, 산과 바다에 초인적인 힘이 있다고 보고 쉼 없이 숭배하고 경외했다. 구구절절 자손들의 안녕과 복을 빌었고 먼저 떠난 조상들을 추모했다. 아직도 마을 어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돌하르방’이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뒤늦게 들어온 불교는 이 토속신앙과의 융합을 시도하며 표표히 성장했다. 제주 불교의 오랜 흔적에 산신(山神)이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숙종 28년, 1702년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천형(天刑)의 유배지에서 그가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알몸으로 물질하는 해녀들이었다. 또 하루 끼니거리까지 바쳐가며 자연에 제(祭)를 올리는 도민들이었다. 뼈 속까지 유자(儒者)였던 그는 이들을 미개하고 무식하다 여겼다. 사당과 사찰들을 불태우고 글을 가르치며 제주의 풍습을 유속(儒俗)으로 바꾸었다. 도민들은 목민관으로서 풍속을 교화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는 이유로 이형상의 공덕비를 세우고 칭송했다. 그러나 불교는 이후 2백 년 동안 무불(無佛)시대의 암흑기를 견뎌야했다. 근대 제주 불교는 그렇게 오랜 세월 불우했다.

바다 건너 육지의 온갖 시비(是非)거리에는 무심해진 지 오래됐다. 그래도 몇 가지 확신은 있다. 우선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도 트럼프도 제 정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싸우기 전에 너무 말이 많다. 안 싸우겠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할 줄도 모르는 유약한 나라의 위정자들은 입만 열면 ‘대화’ 타령이다. 안쓰러울 지경이다. 결국 중국이 더 나설 것이다. 공멸을 바라지 않는다면. 적폐는 분명 청산돼야한다. 그러나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집단광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기껏해야 졸렬한 복수극 아니면 밥그릇 싸움인데도 감히 ‘적폐청산’의 등에 올라타 밤낮으로 악다구니만 세우는 것은 아닌지 칼자루를 쥔 자들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나라 전체가 무엇인가에 홀려 문화혁명 시대의 홍위병들을 연상케 한다는 어느 정치인의 말도 곱씹어 볼 필요는 있다. 한창 배우고 공부해야할 나이에 돌을 던지고 감옥에 있었던 세대가 이 땅의 민주주의와 도덕적 자부심을 일궜음을 인정한다. 또 박정희의 푸른 능금을 먹고 자란 나의 세대가 그 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오랜 무능과 무지를 언제까지나 변명해줄 수는 없다.

제주의 나를 가장 슬프게 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나를 가장 위로해 준 것도 외로움이었다. 나는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 더욱 더 외로움을 택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서둘러 도망쳤다. 제주의 바람은 소망하는 대로 불었다. 바람이 부는 날도 바람이 불지 않는 날도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언제나 서러운 피로가 몰려와 그리운 것들을 자주 그리워할 수도 없었다. 밤마다 횡포처럼 불면(不眠)이 찾아오면 음악을 들었다. 김현식의 ‘사랑할 수 없어’,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임재범의 ‘그대는 어디에’, 이상은의 ‘언젠가는’... 밤새 방안에 울려 퍼졌다. 한라산 중턱에서 시작된 비가 새벽부터 그치고 있다. 으르렁 거리던 파도도 잠잠하다. 이제는... 그가 왔으면 좋겠다. [2017년 11월 29일]

 

양창욱 wook1410@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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