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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코로나19로 빗장 건 세계...그때 흥천사에서 흥선군은?

기사승인 2020.10.16  11: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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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1년 정도 안진경체를 익혔다. 이후 서예 작품을 만나면 내가 글쓴이가 돼, 붓 길을 더듬어 보게 된다. 작가가 어느 지점에서 붓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나아갔는지를 따라가 보게 된다. 이를 몇 번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글쓴이의 생애와 생각까지 쫓게 된다. 돈암동 흥천사 인근에 살고, 주말이면 흥천사를 가로 질러 정릉으로 아침산책을 하며 오가다 마주치는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편액 또한 그랬다.

흥선대원군은 스승인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초에 있어서 해동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서화에 능했고, 통도사와 흥천사 등에 편액을 남겼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거처하며 정치를 펼쳤던 운현궁 곳곳에는 스승과 동문의 편액이 걸려 있고, 정치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을 때는 주로 서예를 했다고도 전해진다. 추사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 뒤에 운현궁의 주요 건물이 지어졌기에, 이곳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이 스승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 그만큼 스승에 대한 애정이 편액만 보아도 각별해 보인다. 아마 추사와 흥선군 모두 당시 안동 김씨로부터 견제를 많이 받았기에 사제 간의 정은 정치적 연대로 승화 되었을 수도 있다. 추사는 당대에 이미 명필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으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도와 북청으로 긴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혼돈의 개화기, 조선은 노론 벽파와 시파로 나눠져 당파 싸움에 치중했다. 노론의 벽파는 추사가 속한 경주 김씨가, 시파는 안동 김씨가 주도했다. 추사는 북청 유배 후 과천에 칩거하다가 봉은사 판전의 글씨를 남긴 후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였을까, 흥선군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앉히는데 성공하자, 추사의 제자 신헌과 조카사위 홍순목 등을 중용했다.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으로만 각인된 흥선대원군은 친 불교적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실의 첫 원찰 흥천사를 중수하고, 이전에 신흥사로 불렸던 흥천사의 본래이름을 다시 찾아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간에 흥선군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가야사의 불을 지르고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명당은 흥선군의 부친 묘 이장을 소재로 하는데, 영화에서 흥선군은 권력을 위해 훼불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러나 영화와 달리 가야사는 그 당시에 매우 쇠락한 사찰이었고, 흥선군은 이장을 위해 막대한 돈까지 사찰에 지불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인에 의한 남원군 묘 도굴 시도 이후 흥선군은 가야사를 대신해 인근에 보덕사를 새로 짓기도 했다. 조선왕실 원당을 연구한 탁효정 박사는 흥선군의 친 불교적 행보는 그의 문화적 소양과 왕실복원에 대한 의지에 기반 한다고 분석했다. 서울 흥천사는 물론 예산 보덕사도 직접 다녀왔다는 탁 박사는 양 사찰의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고 전했다. 왕실의 내원처럼 꾸며진 양 사찰은 궁궐건축 전문가들이 건립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흥선군이 가야사터로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것은 명당에 대한 과신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이벤트로 보인다. 경기도 연천의 부친 묘를 파묘해 많은 인원이 상여를 메고 충남 예산까지 가면서 위용을 과시했다고 한다. 또 가는 동안 동네마다 들러 술과 고기를 대접하는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2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명당으로 이장을 한다는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이 빗장을 닫고 있다. 아니, 많은 이들이 스스로 해외로 나서지를 않고 있다. 개방과 교류로 함께 성장했던 지구촌이 코로나19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함께 있어야 더욱 번영하고 즐거웠던 인류가 바이러스로 인해 언택트를 택한 것이다. 경우는 많이 다르지만 조선 말기 우리는 스스로 빗장을 닫아 걸고 쇄국을 택했다. 당시의 선택을 두고 지금의 우리는 그때 우리가 개방을 조금만 더 일찍 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쇄국정책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도 한다. 흥선군은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 아들 고종과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권력투쟁 와중 곳곳에서 매번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맞았을 것이다.

흥천사를 중수하고 직접 쓴 편액을 하사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가 원했던 조선왕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흥천사를 거닐며 마주치는 세 글자에 담긴 무게감이 더해만 간다.

홍진호 기자 jino413@naver.com

<저작권자 © 불교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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