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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세계 최대에서 최고로 ‘하사창동철불’

기사승인 2020.09.14  15: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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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현지에서 나처럼 여행 온, 한 한국인 의사를 만나 함께 다녔다. 배울 점도 많았고 취향도 비슷했지만 둘 다 유물에 관심이 많았기에, 새로운 지역에 가면 제일 먼저 박물관부터 찾았다. 그리고 인도 현지 박물관에서 파괴 된 불상과 불두를 숱하게 접하면서, 광활한 대륙에 흔적만 남은 불교를 씁쓸하게 음미했다. 그 후로 해외취재를 참 많이도 다녀왔다. 1년에 3~4회 매년 약 한 달은 해외에 있었다. 중국 둔황 막고굴과 미얀마의 쉐다곤 파고다, 일본 조동종의 총본산 에이헤이지, 미국 샌프란시스코 젠 센터,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등 인도 밖에서 만난 불교는 인종과 국경, 언어를 초월해 세계종교로서의 위상과 자부심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 높이 2.81m, 무게 6.2톤에 달하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철불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좌상을 만나게 됐고, 40분물 역사 다큐의 원고를 쓰게 됐다. 인도철학을 전공했고, 글이야 기자로서 늘 써왔기에 자신했지만, 정작 우리불교의 역사에 있어 무지 했음을 절감하게 됐다.

, ‘로 불상을 만들었는가?

철불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라는 한정된 시기에, 철 생산지인 충주를 중심으로 철의 운반이 용이한 남한강 일대 지역에서만 조성됐다. 이에 대한 학계의 일반적 견해는 당시 불상조성의 수요가 늘어나자 청동의 대체재로서 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국대 미술사학과 임영애 교수는 그 당시에 청동보다는 밀랍의 품귀가 결정적 이유라고 지적했다. 금동은 밀랍, 철은 흙을 거푸집으로 제작이 가능했다. 특히 막대한 양의 철만 있으면 지천에 널린 흙으로 거대한 불상을 조성할 수 있었기에 철불을 제작했다고 한다. 지방 호족들의 힘이 증가하면서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와 고려시대 개성에 조성된 불상을 지역에서도 조성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무기=, 6.2톤의 무쇠로 불상을 만든 까닭은?

그러나 청동의 대체제로서의 철, 밀랍을 대신할 흙으로 불상을 만들다가, 현존 세계 최대 철불이 그냥 조성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대 국가 시대 철은 곧 무기이고, 힘이었다. 철불이 한정된 시기에 한정된 곳에서 조성 된 후 자취를 감춘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한중일 모두 철불을 녹여서 무기를 만드는 것이 오히려 당연시 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라는 새로운 시대에 수도 개성으로 가는 길목인 하남에서 무려 6.2톤의 무쇠로 철불을 만든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이에 대해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남한강 일대의 충주 철불 이라든가 원주지역에서 철불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런 철불들은 이렇게 커다랗게 만들 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려 초에 광주지역에서 이렇게 거대한 철불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고 그야말로 고려 태조 왕건과 그의 호족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왕규와의 관련성도 매우 깊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 실장의 설명대로라면 하사창동 철불은 고려건국을 기념하는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불사였다.

무기를 녹여 평화를 염원하지는 않았을까?

정치와 종교는 원래 한 뿌리였다. 먼 옛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법과 제도라는 국가의 육체는 정치가, 정신은 종교가 맡아왔다. 이제 정교가 분리 됐지 한참이 지났지만, 민중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정치와 종교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라는 새로운 국가가 출현하려는 시기, 민중의 심신은 많이 지쳤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전란이 끝나면 무기를 수거해서 농기구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방 군벌의 무력을 약화시키고,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문재범 전 하남역사박물관장은 고려 초기에 철을 가지고 부처님을 만들었다는 것은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수거해서 그것으로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을 만들어 오랜 기간 전쟁을 통해서 피폐해진 민심을 다스리는 한편 무기를 회수함으로 해서 사회적 안정을 꽤하는 두 가지 효과가 분명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민심은 곧 하늘이었기에, 무기를 녹여 불상을 만든 것은 그만큼 당대인들이 평화를 염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사창동철불은 누구를 모델로 했을까?

부처님 당시에는 불상이 없었다. 불상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현재 파키스탄의 간다라 지역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에 의해 조성됐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종교화 되면서 불상조성의 필요성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즉 불상은 동양 정신문명의 근간인 불교의 교주를 서양의 예술기법으로 구체화 한 것이다. 그래서 이었을까?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만난 불상은 대부분 서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 가면 중국 사람과 일본에 가면 일본인과 닮았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집중 조성된 지방의 다양한 불상은 지역 정치 지도자의 얼굴을 모델로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성형외과 의사인 황건 인하대 의대교수는 조선시대 미인도와  불상의 얼굴을 계측해 보니 매우 유사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황 교수는 불상의 모델은 그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국가 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였고, 혼인 또한 계급 간에 행해졌다.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미남과 미인의 얼굴은 지배계급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전 시대 철불의 크기와 완성도를 압도하는 하사창동철불은 어쩌면 은연중에 고려 태조의 얼굴이 녹아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1992년 북한 개성의 왕건릉 옆에서 발굴된 왕건상이 이 불상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BBS 개국 30주년 특집 세계 최대의 철불을 찾아서 다큐 원고를 쓰면서 영상 인터뷰를 담지는 못했지만,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와 이주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등과 한차례 씩 통화를 했다. 하남의 역사적 뿌리가 백제이고, 백제불교는 간다라 지역에서 온 마라난타 스님에게서 전래 되었기에 연관성이 있는지, 또는 하사창동철불은 형태적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매우 유사했기에 이에 대해서도 여러 궁금증이 생겨, 동분서주 말도 안되는 질문만 쏟아냈다. 한중일 3국을 통틀어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철불이 옛 고려시대 광주목, 현 하남에서 왜 조성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불과 100 여 년 전에 발견 돼 옮겨 졌는지는 천년의 세월만큼이나 신비롭고, 알면 알수록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예전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최영도 변호사를 만나 인터뷰 한 적이 있었다. 국내에서 첫 손가락 꼽히는 토기 수집가이자, 서양화와 클래식에 있어서도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는 고인은 세계의 유수한 불교사원을 모두 다 둘러 보고 난 뒤, 우리나라 경주 석굴암이 세계 최고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때는 머리로 그 말을 이해했어도 가슴으로 새기지 못했는데 하사창동철불을 만나고 나니, 그때 그 말이 절절하게 다가왔다국보로 승격되기에 모자람 없는 하사창동철불이 지금 이 시대 보다 많은 이들과 만나 찬란한 우리 역사문화를 되새기는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 1000년 전 조성 돼, 약 100년 전 다시 나툰 철불은 3기 신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하남을 상징하는 최고의 불상으로 충분해 보인다.

홍진호 기자 jino413@naver.com

<저작권자 © 불교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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